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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마모토에서의 우연

그때 그때 듣는 음악의 장르가 워낙 달라지는 편인데, 한동안 듣지 않다가 최근 몇 개월은 J-Rock 을 많이 들었다. 운동할때나 드라이브 할 때 특히 많이 들었는데 고등학교 다닐때 생각이 나서 좋더라.

영상도 많이 봤다. 뮤직비디오나 라이브 공연 영상 같은거. 대형 운동경기장급 공연이 아닌 라이브 하우스에서 공연하는 밴드들의 영상을 많이 봤다. 스피커를 좋은걸로 바꾼 이후에는 확실히 라이브 음악을 많이 듣게 된 것 같다.

심지어 아내에게도 보여주며, 저런 작은 라이브 하우스 같은 곳에서 하는 밴드의 공연을 보고 싶다고 말하기도 했다. 국내에서 몇 번 가보긴 했다. 누군가를 따라간거라 밴드들을 잘 알지는 못했지만 나름 충분히 즐겼었고 재미있었던걸로 기억한다.

어쨌든 그렇게 최근에는 한 장르만 계속 즐기고 있던 중이었다.

올해는 가족행사나 바깥 고양이들 중성화를 포함해서 연초부터 이벤트가 너무 많았던지라 딱히 어딘가에 놀러가서 정신놓고 먹고 마시고 쉴시간이 없었는데, 마침 친한 동생커플이 일본을 가자고 꼬득였다. 그 커플과 작년에 일본을 다섯번이나 갔었다. 그것도 구마모토만. 뭐… 한명은 일본의 다른 지역에 사니까 그렇다 치더라도 많이 간건 맞다.

구마모토만 계속 가는건 내가 많이 힘들고 지쳤을때 정말 엄청나게 큰 위안을 받고 온 곳이라서 평소에도 자주 생각나기 때문인데, 막상 가면 익숙하면서도 늘 새로워서 좋다. 만약에 거기서 거주한다면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여행객인 나는 마냥 좋다.

예전부터 여행을 함께 다니는 제일 친한 커플도 오랫만에 시간이 맞아서 함께 가기로 했다. 그렇게 총 6인. 아소산 드라이브를 위해 이번에는 8인승 승합차를 렌트했었는데 그것도 꽤 재미있었다.

구마모토를 처음 갔을때는 직항도 있었는데 지금은 없다. 새벽에 김해공항으로 가서 후쿠오카에 도착, 그 후에 신칸센을 타고 구마모토로 가야하는 번거로움을 이겨낼 정도의 매력이 나에게는 있는 곳이다. 물론 시간만 넉넉하다면 대구에서도 갈 수 있겠지만 출발/도착시간이 별로 좋지 않은데다가, 고양이들을 챙겨줘야해서 우리 커플이 동시에 집을 비우는 여행은 최대 2박 3일이 한계. 이게 최선이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출발하기 전날밤 잠을 심하게 설쳤다. 총 세 시간 정도 잔 것 같다. 운전을 두 시간하고 해가 뜨니 몽롱하더라. 도착해서 번거롭지 않도록 일행들에게 미리 나눠줬어야 할 eSIM 이라던가, 온라인 출입국신고서 작성도 빼먹고 그냥 멍하게 대기하다가 비행기 탑승 후 좌석에 앉아서 기절했다. 그것도 어쩐일인지 20분밖에 못잤는데, 어쨌거나 정신은 많이 차려졌다.

도착해서 미리 도착한 커플과 합류해서 1870 년대부터 영업하고 있는 식당에서 식사 후 나쓰메 소세키의 집을 구경했고 (고택 구경은 항상 좋다) 그 후에는 예전에도 몇 번 갔었던 로스터리 커피샵 Coffee Gallery 에 갈 계획이었는데, 뭔가 거기보다는 여기에 오는 길에 스쳐지나가며 봤던 커피샵을 가보고 싶어져서 일행들에게 제안했고, 천천히 구경하며 왔던길을 돌아갔다.

커피샵이 보일때 즈음, 오는길에 봤을때는 편집샵이 아닐까하고 생각했던 건물, 걸으면서 본 그 건물의 기둥에 붙어있는 인쇄된 흰 종이에는 “SCANDAL” 이라고 적혀있었다.

“가만… 이 가게 이름인가? 나 요즘 SCANDAL 노래 엄청 많이 듣는데…” 라고 생각을 하고 지나치는데, 기둥의 다른 편에는 SCANDAL 의 새 앨범 포스터가 붙어있네? 음???

이때까지도 반갑긴 했지만 마음의 동요는 크게 없었다. SCANDAL 의 굿즈를 한정으로 판매하는거 아닐까 하는 생각만 잠깐 했었던 것 같다. 일행들에게 잠시만 멈춰보라고 하고, SCANDAL? SCANDAL?? 하며 갸우뚱하고 있었는데, 일행 중 일본에 사는 M이 관계자에게 가서 물어봐줬다.

SCANDAL 콘서트를 한 시간 뒤에 여기서 한다고 한다.

방금 일어난 일을 사고하는데에 시간이 조금 필요했다. 믿을 수 없어서.

그 자리에서 “세상에”를 몇 번을 말했는지 모른다. 기억이 나질 않는데, 이후에 Y가 언급하길, 내가 열 번은 넘게 말했다고 했다. 그렇게 놀란 얼굴표정을 지은것도 처음 봤다고 했다. 나는 내 얼굴이 어땠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다행이려나.

아무튼 내가 가도 괜찮을까 하는 생각부터 들었다. 일행들과 계획해서 예약까지 해놓은 저녁 약속이 먼저고, 이 공연은 티켓이 남아있을지 모르는 상황이라서.

그래서 안간다며, 괜찮다며, 가던길 가자고… 그랬지… 내가…

일행은 모두들 이런 기회가 없다며, 운명이라며 나보고 다녀오라고 등을 떠밀었지만 난 일단 커피부터 한 잔 하자고 했다. 정말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ㅋㅋㅋ;; 잠도 많이 못자서 지금 무슨일이 일어났는지 모르겠단 말이다 ㅋㅋㅋ;;

Glutch 에서 마신 Sidamo Bensa Segera

일단 공연장 옆 커피샵인 Glutch 에서 커피를 한 잔 하며 생각을 해보기로 했다. 아, 일단 커피는 정말 맛있었다. 묽은 느낌임에도 질감은 시럽같았는데 상호배반적인게 어우러져서 신기했다. 물론 밝은 산미와 은은한 꽃향기도 너무 좋았다. 마음이 콩밭에 가있지 않았으면 커피맛을 더 즐길 수 있었지 않았을까… 하.

그렇게 커피를 마시며 진정하고 생각을 해보니, 역시 가야겠더라. 티켓만 남아있다면.

일행들도 어찌나 얼마나 떠밀어내던지 ㅋㅋㅋ 내가 평소에 뭔가를 좋다고 말하는 편이 아니라고 한다.. 대부분 “나쁘지 않다”가 상한선이라며 좋아하는게 있을때 꼭 가보라고 하는데, 다들 어찌나 그렇게 얼굴들이 밝고 해맑으신지… 자기들이 다 긴장된다고 하더라. 니네가 왜!! ㅋㅋㅋ

커피를 다 마시고 나와보니 공연장 앞에는 벌써 굿즈 티셔츠를 입은 팬들이 공연장 1층, 2층, 옆, 뒤, 앞에 줄을 서서 대기하고 있더라. 남은 티켓이 있을까 싶었다. 그렇게 불안해 하던차에, 이미 M이 티켓을 구입해와서 건낸다. 오!?

공연티켓이다!

일행은 그렇게 떠나고 혼자 덩그러니 남았다. (잠시 뒤 생수병을 건내려 돌아왔다. 갈증방지라며, 친절하게도.) 일본어도 할 줄 모르는 외국인 인간이 방금 세워놓은 망부석처럼 서있으니까, 아까 M과 이야기 하던 스텝분이 신경쓰이셨나봐. 저쪽에서 기다리면 된다고 안내까지 해주셨다. 아, 친절한 사람이여.

역시나 공연장 앞에서 대기하던 공식팬클럽 회원들이 먼저 입장하고, 스텝들이 미리 배정해준 번호대로 사람들이 질서정연하게 입장했다. 그 후에 번호가 없는, 현장발권을 한 나를 포함한 대략 10여명이 제일 마지막으로 입장했다. 입장하면서 굿즈도 하나 샀다. 훗. 그리고 잠시 뒤, 공연이 시작됐다. 두근두근…

찍은 사진에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서 볼 수 있었다

공연은 너무 좋았다! 시간이 멈췄으면 했다. 새 앨범 발매기념 투어라서 제일 좋아하는 “ハイライトの中で僕らずっと”를 직접들을 수 있었던게 가장 감격스러웠다. 어찌나 여운이 남던지. 공연 중반쯤 쉬는 시간에 TOMOMI 는 구마모토 특산품 이키나리 당고를 맛있게 먹으며 설명하기도 했고,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화기애애한 이야기들도 많이 했고, 공연 후반에는 MAMI 도 이키나리 당고를 결국 먹었다ㅋㅋㅋ 엄청 맛있어 하더라. 관객들도 엄청 기뻐했다. 아무래도 구마모토 사람들이니까.

내 옆에는 신내림을 받은듯한 청년이 음악에 맞춰 손을 흔들고 헤드뱅잉을 했는데, 바로 옆에 있었음에도 옷깃하나 스치지 않았다. 저쪽편에는 엄마와 딸, 그리고 60대쯤 보이는 신사분도 계셨으며, 방금 퇴근한 듯 정장을 입은채 넥타이만 느슨하게 푼 사람도 보였다.

신기하게도 아무도 사진을 찍거나 영상을 촬영하지 않더라. 몇 장 찍다보니 그런 느낌이라 주변을 돌아보니 나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찍지않아?! 그래서 멈추긴 했다만 조금 의아하긴 했다. 나중에 공연이 끝나고 HARUNA 가 사진을 찍자고 하는 순간에 모두들 휴대폰을 꺼냈다. 아… 이 우매한 인간은 그것을 몰랐구나.

노래를 부르고 연주를 하는 시간에는 모든 관객들이 그것에만 집중해서 즐기고 있었던거다.

다양한 관객층과 이런 공연문화, 매너… 모두 너무 멋지다. 내가 초반에 실수를 했지만, 이후에는 정말 편하게 공연에만 집중하며 즐길 수 있었다.

공연을 마치고 나오며 찍은 포스터

공연이 끝나고 나오면서 포스터 사진을 찍고 싶었는데, 조금 머뭇거렸다. 관객들이 나오는데 이 외국인놈이 뭘 찍고 있으면 좀 뻘쭘하실 듯해서… 그런데 그 때 마침 깡마른 청년이 내 앞에서 포스터를 찰칵 찍더니 뒤를 돌아서며 내 눈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구나. 나도 찰칵. 말을 섞지는 못했지만, 고마웠네, 청년.

그렇게 발걸음을 옮겨서 일행들이 먼저 가서 식사중인, 내가 사랑하는 야키토리 가게로 향했다. 15분 거리를 걸으면서 내려가지 않는 입꼬리는 별로 숨길 생각도 없었다. 이렇게 좋았던 적이 내가 살면서 얼마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은 해봤다.

야키토리 가게에서 일행과 조우. 여러번을 왔지만, 사장님과 음식들, 분위기 모두 최고다

일행들은 벌써 많이 먹고 술을 어느정도 마셔서(…) 다들 해맑게 웃으며 반겼는데, 방금 좋아하는 사람한테 고백하고 온 사람을 대하듯 톤을 높여서 반쯤은 놀리듯 좋았냐고 물었다. 다 받아드리리다. 내가 오늘은 아주 행복한 사람이거든. 그랬다.

공연 이야기를 주저리주저리 했고, 다들 잘됐다면서 내가 공연을 보러간게 그들도 신기하고 기쁘다고 했다.

아무리 우연이라지만 정말 지금 생각해도 믿기지 않는다. 대학생 시절에 알게되어 한 번씩 들었었다가 최근에 새 앨범이 너무 좋아서 주야장천 들었고, 작은 라이브 하우스 공연을 가고 싶다고 이야기 했고, 여행날짜도 별다른 생각없이 잡았거니와, 그날따라 매번가던 커피샵이 아닌 다른 커피샵을 가고 싶어서 갔는데 이런 행운을 만나다니. 내 인생의 소중한 기억들 중 하나로 남으리라.

새 앨범 LUMINOUS 굿즈 중 타올을 구입했다

다음날부터 귀국하는 날까지 여행 내내 기분이 좋았다. 공연을 노리고 갔었더라면 좋았어도 이만큼 좋지는 않았을 것 같다. 지금도 좋다. 앞으로 얼마나 지속될지는 모르지만, 그냥 기분이 좋은걸 그대로 즐기고 싶다. 행복하다.

몇 년 전 내가 지쳤을때 힘을 불어 넣어준 것도 고마운데, 이런 형용할 수 없이 좋은 기억까지 만들어주다니.

구마모토는 참 신기한 곳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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