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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택근무 8년차 원격외노자

원격외노자가 된지 벌써 8년.

간혹 궁금해하는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형태로 일하는지에 대해 SNS에서 짤막하게 이야기를 했던적은 몇 번 있는데, 그 동안의 경험과 생각을 떠올리면서 정리하는 시간을 갖는 것은 처음이다. 이런 생활과 업무가 익숙해지다 보니 더 당연하다고 생각되기 전에 기록해 두는 것도 의미 있을 것 같고, 초심을 느껴보는 계기도 되리라는 생각에 키보드를 두드려본다.

하루와 일주일

일찍 일을 시작해서 일찍 끝내는 편이라 낮을 즐길 수 있어서 좋다. 일찍 일어나는 것은 익숙해져서 괜찮은 편. 약속이나 특별한 일이 있지 않는 이상, 평일의 일과는 보통 이렇다:

시간하는 일
03:00-04:00기상 (알람은 04:00 이나, 대부분 3시쯤 깸)
04:00-04:30모닝루틴 - 야옹이들 인사(궁팡), 차/커피 만들기, 스트레칭.
04:30-11:30업무시간. 대부분 사람들 퇴근 시 퇴근, 남은일이 있으면 오후에.
11:30-14:00점심식사 및 휴식, 가끔 Siesta.
14:00-16:00운동 혹은 취미활동, 외출
16:00-18:30청소, 샤워, 저녁식사
18:30-21:00남은일 처리 혹은 취미활동
21:00침실로.

일주일 중에는 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업무를 한다. 단점보다는 장점이 많은 것 같다. 월요일에 한가하게 장을 보거나 한적하게 드라이브를 할 수 있고, 토요일에 하는 업무는 평일의 무게감 같은게 없어서 토-일-월 주말의 연장으로 여기는 편. 조삼모사 같긴 한데, 좋은게 좋은거니까.

수면은 힘든 것

어쩌다 보니 Miracle Morning 을 실천중이다. (사실 그런게 있는지도 몰랐다)

처음 입사했을때는 오전 2시에 일어났다. graveyard-shift 에 가까운 업무시간이라 몸이 망가지더라. 3시로 늦춘 이후에는 꽤 많이 나아졌다. 내가 느끼는 2시와 3시의 차이는 하늘과 땅의 차이였다. 2시는 늦은 밤, 3시는 아주 이른 아침의 느낌이었다.

그 이후에는 잠들기 어려운 시간인 저녁 7-8시쯤에 잠드는 것을 바꿔보려 했다. 10시쯤 잠들어서 3시에 일어나는 것이 할만하긴 했는데, 집중력이 현저하게 저하되었다. 그렇다고 7-8시쯤 침실에 들어가봤자 잠을 잘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침대에 눕는 시간과 총 수면 시간을 조절하다 보니, 기상시간도 저절로 밀려났다. 대략 저녁 9시에서 아침 4시까지 자려고 노력하는 편인데 고질적으로 수면의 양과 질이 좋지 않아서 그때그때 다르긴 하다.

어쨌든, 업무를 시작하면 미국 시간으로는 오전 11시에서 오후 12시쯤이다. 그런데 회사에서는 내가 몇 시에 자고 몇 시에 일어나든 전혀 관심이 없다. 그래서 이런 고민은 혼자 하는 쇼에 가깝다고 보는게 맞을 듯 하다만, 정확히는 잠깐이라도 동료들이 있을때 함께 일하면서 커뮤니케이션(뭐든지 아무말)을 하고 싶기 때문이다. 동료들인데 친하게 지내야지. 그럼그럼.

대신 회사에서는 프로젝트 관련 회의와 격주마다 있는 사내회의는 빠지지 말고, 동료들과 겹치는 업무시간을 하루 4시간 가량은 되도록 온라인 상태를 유지하는 것을 권장하고 있다. 미국 내에서도 동부/중부/서부, 혹은 캐나다에 흩어져서 일하고 있기 때문에 회사에서는 최소한의 동기화를 통해 친밀감을 고양하는 것을 원한다.

원격 재택근무 적응

수면 시간은 둘째 문제였고, 가장 탈이 많았던 것은 “집에서 일한다는 것” 이었다. 원격근무를 시작했을때에는 원룸에서 살고 있었고, 사무실과 집의 공간적인 분리가 되지 않아서 꽤 힘들었다. 물론 언어나 화상채팅/화면공유를 통한 협업도 익숙하지 않았고. (꼭두새벽에..)

매일 출퇴근하던 이전의 방식에서 드라마틱하게 바뀐 “편한” 업무 환경 때문에 일을 늘어지게 한다거나, 쉬는게 쉬는 것 같은 느낌이 아니라던가 하는게 일과 생활 모두에 걸림돌이 되었다.

초반에는 특히 완전히 새로운 기술을 익히는 것을 병행해야 했기에, 업무와 공부, 생활 셋 중에 제대로 되는게 하나도 없었다. 물론 뭔가가 되고있긴 했어도 내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1년 쯤 지난 후 조금씩 개인적인 시간을 찾으면서 나아지기 시작했고, 이사를 하며 공간 분리가 이루어진 2년차 쯤에 완벽히 적응이 된 것 같다.

Core-contractor

서류상으로는 계약자로 속해있다. 정식 직원이 아니라 의료보험, 세무처리 같은 미국 행정과 관련된 “회사 외부적”도움이나 혜택은 전혀 받지 못하지만(사실 필요가 없는 것이긴 하다), 새 기기나 업무에 관련된 구매에 따른 지출을 지원받는 hardware budget 이나 미국행 여행 경비 지원 등 “회사 내부적” 혜택은 다른 정규직 직원들과 동일하다.

실제로 회사 대표들은 나를 다른 직원들과 동등한 “가족”으로 대우하고 있다. 온/오프라인 행사 참여의 기회나 명절 선물등등 모두에게 제공되는 것들을 동일하게 받고 있다. 여행 경비는… 항공표 때문에 내가 회사 지출을 늘리는 편이긴 하지만, 회사에서 제일 친한 동료집이나 누나집에서 매번 머무르기 때문에 호텔 숙박비는 없으니 퉁쳐도 되지 않을까…?

가끔 오프모임

일년에 최소 두 번은 회사 모임이 있다. 첫번째는 Portland 에서 날씨가 가장 좋은 7월쯤 세계 여러곳의 개발자들이 모이는, 회사가 주관하는 기술 컨퍼런스를 개최하기 때문이고, 두번째는 평일 5일간 합숙하면서 전 직원이 모여서 친목을 다지며 회사의 발전 방향에 대해 토론하고, 채팅과 화상회의로는 할 수 없었던 이야기도 하고, 같이 코딩을 하거나, 먹고 노는(?) 행사다.

보통 한 번씩 행사가 있으면 앞뒤로 휴가를 붙여서 대략 2주 정도 미국에서 시간을 보내며 잘 먹고 잘 놀고 오는 편이라 어떤 이유로든 “출근”하는 기분은 항상 좋고 기대된다. 심지어 비행기 타는 것도 좋아하는 편이다.

급여와 세무, 대출

급여는 외환계좌에 미 달러화로 받는다. 그래서 원-달러 가치에 따라 연봉이 유동적이다. 불과 몇 주 전까지만 해도 월급여로 받았는데, 다른 동료들과 지급일이 달라서 발생하는 번거로움을 줄이기 위해 최근에는 격주마다 급여를 받고 있다.

첫 입사때는 일한 만큼 시급으로 받았다. 정량적으로 측정되지 않는 업무의 분량을 시간으로 측정해서 급여로 계산한다는 것이 소프트웨어 개발에서는 상당히 모호한 개념인데, Toggl 이나 Harvest 같은 툴들의 사용과, effort points - 이 정도 기능은 경험으로 봐서 이 정도 시간이 걸렸다 혹은 걸릴 것이다 로 환산한 세밀한 Task estimation, 사장이 생각하는 개인의 역량과 개개인의 청렴함(?)으로 꽤나 잘 유지되었던 것 같다. 회사에 인력이 증원되고 프로젝트의 수가 많아지면서 현재는 연봉제로 바뀌었다.

세무와 관련해서는 개인적으로 100% 한국에서 처리를 한다. 한-미간 조세협약에 따라서 미국과 한국 중 한 곳에 세금을 납부하면 되는데, W-8BEN 이라는 양식을 작성해서 회사와 내가 한 부씩 보관하고 있고, 미국 내 세무적인 부분은 관련 업무를 관장하는 동료가 처리를 한다. 물론 나는 한국에 달러를 벌어들여서 한국 정부에 매년 5월 종합소득세를 납부하는 착한 시민이다. (탈세, 부끄럽지 않냐.)

웃지 못할 일화가 하나 있는데, 긴 이야기를 짧게 한다면… 연소득 2400만원 이상이면 개인이 세무를 처리하려고 하지 않는편이 좋다. 세무사가 괜히 있는게 아니다. 위택스 시스템은 조건문이 완벽히 처리되어 있지 않아서 특정 조건이 성립되어야만 어떤 것이 활성화되거나 비활성화 되는 그런 방어장치가 잘 안되어 있다.

내 조건에 해당되지 않는 항목에 입력이 가능했고, 그 세무처리가 문제가 되는 바람에 엄청 큰 금액 + 재신고에 따른 일별 가산세를 토해낸 경험은 전혀 즐겁지 않았다. 3일에 걸쳐 매일 통화했던 지역 세무서 담당자님도 고생 많으셨다. 개인 사업자나 프리랜서는 세무사를 활용하는게 좋다.

추가로, 대출은 엄두를 내지 못한다. 4대 보험 가입은 커녕 개인 사업자도 아니고, 프리랜서들이 받는 원천징수 영수증이나 지급명세서 같은 서류도 없다. 따라서 한국 내에서 내 직업은 백수다. 대출 상한액도 엄청 낮은데다가 서류를 20여장이나 작성해야 한단다. 대출을 받아보진 못했지만, 혹시나 하는 위급상황을 대비해 은행에 방문해서 문의했다가 크게 실망만 했다.

국방/근로/교육/납세. 국민의 4대 의무를 충실히 이행했고, 지금도 이행하고 있으며, 외화벌이도 열심히 하고 있는데 4대 보험 가입여부가 더 강력하다는 점은 많이 안타깝다. 심지어 건강보험 지역가입자로서 내는 보험료도 직장가입자에 비해 훨씬 많다.

커뮤니티에 대한 갈증

사람을 좋아하는 편이라 혼자 일하는 것이 지루했다. 심지어 나는 한국 회사 다닐때 상사들과의 회식마져도 좋아했다(…)

일이 끝나고 친구들을 만나기도 했는데, 어쩌다 보니 전부 영어 강사/교수 외국인들 이라서(…기구한 운명 덕분에…) “회사 친구” 혹은 “개발 이야기를 안하더라도 개발자인 친구(?)” 가 없는게 항상 아쉬웠다. 친한 회사 동료들과 메신저로 노는 것도 시간적/공간적 한계가 있었고요. 동종업계 종사자와 같이 노는 것은 희망사항일 뿐이었다.

여러가지 시도를 했지만 실패를 했고, “이상한 모임” Slack 을 알게 되었다. 오프라인 모임에 나가서 여러 개발자분들을 알게 되었고, 제주도에 모여서 고기도 구워먹고, 고등어 회도 먹고 그랬었는데 어쩌다가 흐름이 끊어졌는지는 기억나질 않는다.

아무튼 수도권과는 다르게, 내가 살고 있는 비수도권 지방에서는 개발과 관련된 커뮤니티가 전무하다. 적어도 내가 찾아본 결과로는. 모각코 같은 것도 해보고 싶은데 그게 마음만 크다. 이벤트성 수도권 상경은 교통/숙박 뿐만 아니라 시간적인 부담이 있는 편이고. 아직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주변을 종종 찾아보는 편인데, 결과는 항상 아쉽다.

국내 재택근무의 확산에 대한 생각

이렇게 좋은 것은 무조건 추천한다! (…)

코로나 시국으로 인해 많은 직장인들이 재택근무를 경험하고 있고, 특히 개발자들은 나와 비슷한 고민을 하면서, 자신의 휴식을 틈틈이 챙기며, 굳이 출근을 하지 않아도 업무가 되더라 하는 생각들이 짙어지는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아주 좋은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업종들도 마찬가지일 수 있지만, 시간적인 면에서의 개발은 아침부터 붙잡고 앉아서 9 to 5 내내 타이핑만 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공간적으로는 랩탑만 들고 있으면 어디서든 대부분의 업무를 처리 가능하고, 유수 기업들에서 도출된 결과가 뒷받침하고 있기 때문에 굳이 전통적인 업무형태가 정답이라고는 말할 수 없는 시대다.

제주를 포함한 국내 여러 여행지에 숙소를 마련해두고 직원들의 원격 근무를 지원하는 회사들도 하나 둘 씩 늘고 있는 것을 보면 회사 입장에서도 단순한 복지 차원을 넘어서, 생산성의 증대를 위한 원격근무를 지원하는 것에 관심을 갖고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것 같다.

가장 기대가 큰 부분은 순수하게 개인적인 욕심이다. 자유로운 원격/재택 근무환경이 널리 퍼지다보면, 기회가 될 때 같이 일하고 놀 수 있는 개발자가 주변에도 생기지도 않을까 하는.

그 욕심이 현실화 되기에는 아직 시기상조 일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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