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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의 절반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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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봇과 교도소

새 직장에서는 “교정지원로봇”을 만드는 국책과제를 수행하고 있었다. 교도소에서 심야시간에 제소자들의 돌발행위를 감지하는 것이 목적이었는데, 레이져/초음파 등의 센서와 StarGazer 라는 랜드마크 기반 위치 인식모듈, Xtion 카메라(Xbox 의 Kinect 카메라와 거의 동일) 등이 탑재된 로봇을 제작중이었다.

이 프로젝트 관련된 일화들은 끝도 없이 많이 나올 것 같으니 잠시 요약만 한다.

  • 작고 가볍고 조용한 로봇을 예상했는데, 개발 팀장님 탓으로 오토바이 만한게 나왔음
  • 그 팀장님에 대한 이야기는… 좀 엄청난게 많음
  • BBC 에 기사가 남(?)
  • Reuters 는 촬영까지 하고 감(?!?)
  • 아시아 교정포럼 국제회의에 참석함
  • 국내 교도소 여러 곳을 체험함(!?!?) 한국 교도소의 끝이라는 청송교도소 경북북부제1교도소도 방문함 (유영철, 조두순 등이 복역했던 / 하고 있는 곳)
  • 심지어 포항 교도소에서는 수감되었다가 나옴. (물론 체험 및 환경조사를 위해)

…그러하다. 나는 소프트웨어 개발자인데.

술집을 차렸다

신기한 업무경험 말고도 또 하나 인생의 이정표가 있다. 거의 매일 드나들던 그 곳, Sydney St. 펍은 나에게는 거실같은 곳 이었다. 일 마치면 들러서 맥주 한 잔에 부리또 하나 먹으며 TV를 보거나 그 곳에 있는 사람들과 노닥거리기가 일쑤였고, 금/토요일 밤은 펍이 주최하는 파티도 함께했다. 실제로 Daegu English Party 같은 행사를 주기적으로 열어서 외국인들과 한국인들이 같이 어울리기도 했고. (손님은 학원 영어강사, 대학교 영어 교수 등 원어민들이 대부분이었다.)

초반에 몇 번 들르다보니 어떤 외국인 두 명(S 와 R 이라고 하겠다)과 자주 마주치게 되었다. R이 껌을 건내면서 먼저 말을 걸었다. 그 날 이후로 몇 번 더 마주치다보니, 어느날 밤은 제가 맥주잔을 들고 가서 그냥 옆에 앉아버렸다. 내가 좀… 그래…

무슨 말이 오갔는지 모르겠지만 다들 엄청 즐거웠다. 보통 회사 사람들이나 친구들과 술 마시다 보면 신세한탄을 꼭 들어주게 되고, 피곤해져서 집에 가면 녹초가 되기 십상인데, 그런 이야기 하나도 없이 일상이나 스포츠 등등 별 것도 아닐 것 같은 이야기를 별 것 처럼 만들어서 재미있는 대화를 나눴다.

몇 번을 그렇게 만나서 이야기 하다보니, 내가… 좀 그렇기 떄문에… 고기나 구워먹자고 제안했다. 그들은 고기 좋지 라고 대답했고. 그렇게 3명이 금요일 저녁에 퇴근 후 한 고깃집에서 모이게 됐는데, 이 일이 있은 후 거의 1년을 매 금요일 저녁, 빼먹지 않고, 술 한 잔에 고기를 구웠다. 그런 일이 있은 후 S네 집에서 바비큐도 같이 하고, 놀러도 가고, 많이 친해지게 되었다.

시간이 흘러서 Sydney St. 가 가게 문을 닫게 되었다. 사장부부가 호주로 돌아간다고 해서 말릴 수도 없었다. 너무 아쉬웠다. 그 때쯤 그 근처 지하에서 다른 외국인 친구들이 작게 운영하던 스포츠 펍이 있어서 거기로 아지트를 옮겼지만 그 곳도 얼마 지나지 않아서 사장들이 고국으로 돌아가는 사정이 생기는 바람에 문을 닫기로 했다.

조금 미친 생각을 했다. S, R, 그리고 다른 친구 T 와 나, 네 명이 그 가게를 인수하기로 한 것. 내가 행정처리를 하기 상대적으로 쉬운 내국인(?)이라 사장을 맡기로 했다. 문서상 내 이름이 올라갔으니, 바지사장이 맞겠다. 바의 이름은 Downstairs, 이전 대표였던 친구들이 지은 이름을 그대로 물려 받기로 했다.

주류 매입, 회계, 세금납부 등 별 희안한 걸 다 해봤다. 딱히 돈을 많이 벌기 위한 것은 아니었고 “잃어버린 사랑방을 찾아서” 같은 의도였기 때문에 재미있게 했다. 운영은 퇴근 시간 이후 하루에 두 명이 상주했고 바텐딩 이외의 일들은 S 가 직접적인 운영관련, R 이 홍보를, T 는 보조적인 업무를 했다. 나도 이것저것 조금씩 하긴 했는데, 가게 오픈 후 얼마 지나지 않았을 무렵, 예상치도 못했던 곳에서 일이 터져버렸다.

그 당시 교정지원로봇 프로젝트는 끝난 상태였고 소방관련 프로젝트를 추진 중이었는데, 우리 회사가 다른 회사와 합병되어 대구에 있는 사무실을 폐쇄하기로 했다. 팀이 해체가 되는 상황이었고, 대전에 있는 본사로 가던지 퇴사하던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서 나는 본사로 옮기는 방향을 선택했다.

어쨌든 가게는 잘 굴러가는 편이었다. 프리미어 리그 같은 축구 중계를 같이 보는 밤은 손님이 꽤 많았다. 이윤이 그다지 많지는 않아도, 원했던 “사랑방”을 돌려받은 셈이라 더 바랄게 없었다. 영어 교수, 영어 강사를 포함한 외국인들을 주축으로, 궁금해서 방문한 한국인 학생들까지 다양하게 좁은 공간을 즐겨주셨다.

가게는 대략 2년 남짓 운영했던 것 같다. 중간에 여러 자잘한 문제들이 있었지만 결정타는 의지와 무관한 것이었다. 건물주가 바뀌면서 가게를 빼라는 통보를 일방적으로 했고, 어쩔 수 없이 가게를 접었어야 했다. 그런 상황에서 자영업자를 보호하는 법 같은게 있었던 것 같은데, 친구들과 논의 끝에 행정적/법적으로 골치아픈 그림은 우리가 원하는게 아니라는 결론으로 가게문을 닫게 되었다.

가게를 운영하면서 매주 금요일 퇴근 후 혹은 토요일에 대전에서 대구로 KTX 를 타고 오던 기억이 생생하다. 금요일 저녁에 가게 일 조금 도와주며 같이 놀고, 토/일요일은 데이트 후 대전으로 올라가는 그 짓을 꼬박 2년을 했다.

좋았던 때지만, 다시는 못할 것 같다. 지금 생각해보면 믿기지도 않는다.

대전생활

대구 지사 폭파(?) 결정 이후, 확실한 인사발령이 나기 전까지 한 동안은 정리를 끝마치지 않은 대구 사무실과 대전 본사를 왔다갔다 했다. 일주일 중 사흘은 대구에, 이틀은 대전에 출장으로 머무르는 형태로. 대전의 둔산동에 있는 펍들이 없었다면 버티지 못 할 스트레스였다.

퇴근 후 바에서 한 잔, 모텔에서 수면… 이런 출퇴근 형태 만이라도 유지되면 좋았을텐데, 회사와 협의가 될리가 없었다. 대구를 떠나기 싫었다.

대구-대전을 왔다갔다 하던 시기 큰 힘이 된 Sponge 라는 칵테일바.

퇴사와 본사로의 이동, 두 갈림길에서의 선택을 이때까지만 해도 고민했었는데, 끝내 이동을 택했을때의 여담으로는 이런 것들이 있다:

  1. 인사발령이 결정되고 대구 내에서 이사한지 3개월 밖에 안된 원룸을 떠나서 대전으로 이사를 했다. 그 후 1년 몇 개월 뒤에 또 이사를 했다. 이사는 이제 치가 떨린다.
  2. 초등학생때 구경했던 대전 엑스포… 를 다시 보게 될 줄은 몰랐다. 특히 “엑스포 아파트”, “엑스포 마트”, “엑스포 세탁소”등의 존재를 실제로 보게 될줄은 더더욱 몰랐다.
  3. 대전이 한적하다는 이야기는 들어봤는데, 특히 내가 살았던 전민동은 섬 같은 느낌이었다. 번화가는 물론 다른 주거지역과도 동떨어져 있어서, 심심한 시간을 보냈다. (이때 많이 늙었다.)
  4. 대전살이 중반쯤에 도저히 안되겠다 싶어서 검색해보니 친목 모임이라는 것의 존재를 찾게 되었고 오프라인 모임도 몇 번 참석도 해봤다. 그 만큼 심심했다. 그런데… 별로 유쾌한 모임은 아니더라.

어쨌든 이렇게 된 것, 대전에서 새출발을 해보기로 마음먹었다. 본사로 이전을 결정하게 된 계기 중 “배울거리가 많을 것 같아서”가 결정적이었다. 본사는 대형 통신사의 망에 들어가는 게이트웨이 장비를 만들고 있었고, 직원들의 근속 년수들이 상당히 높은 편이며, 카이스트 출신 분들이 많이 계셨다.

특히 수석 연구원분들은 신호/데이터 통신은 물론 C 언어와 어셈블리어에 대한 조예가 엄청 깊으신 분들이셨고, 필요한 라이브러리들은 굉장히 빠른 속도로 제작해서 쓰신다거나 리눅스 커널을 깊은 곳까지 뜯어 입맛에 맞게 고쳐서 쓰시는 분들의 집합이었다. 직접 만나본 개발자들 중 가장 고인물 뛰어나신 분들이 아닐까 싶다. 그 어마어마한 분량의 코드들에서 mutex 와 barrier 를 숨쉬듯 쓰시면서도 구현 후 컴파일 한 번만에 프로세스가 정상 작동한다거나… 아무튼 내눈에는 대단한 고수분들이셨다.

내가 소속된 팀은 자체 개발된 시그널링 게이트웨이(SGW - 전화 신호 변환 처리) 와 트렁크 게이트웨이(TG/W - 전화망과 패킷망의 트렁크 연동) 하드웨어에서 실행되는 시스템 소프트웨어를 개발/운영 하고 있었다. 신규 입사로 면접을 보러 왔다면 문턱에서 탈락했을 정도로 이쪽에는 아는 바가 없었는데도 어떻게든… 뭔가를 했다. 다들 너무 바쁘셔서 뭔가를 장황하게 교육시켜주실 시간은 없었는데, RFC 도 엄청 읽고 소스코드에 뭔가 넣기도 했던 것 같은데, 정확한 이해 없이 부분적으로만 뭔가를 해서 정리된 기억이 거의 남아있질 않다.

몇 개월 후 대규모 인사발령 후에는 IPSec 기반 시큐리티 게이트웨이 개발 팀으로 합류를 했다. 그 팀의 팀장님은 다른 팀장님들에 비해 엄청 젊으셨는데, 카이스트 물리학과를 졸업하신 비전공자임에도 전체적인 개발과 사업에 대한 이해도가 대단하시고 팀 운영이나 그 외적인 부분에도 총명하신 분이었다. (역시 카이스트 대단하네.)

서버실은 시끄러워도 항상 시원해서 좋았다.

해당 팀에서는 재미있는 일들도 했다. 안드로이드 커널 모듈을 수정해서, 개발 중이던 게이트웨이에서 LTE 망과 WiFi 를 동시에 사용하는 기능구현과 클라이언트 앱 개발에 참여했었고, 특히 “갑”인 대형 통신사의 시연 앞에서는 수 많은 밤을 지새우고 수 많은 소맥을 마셨다.

업무적으로 가장 힘들었으면서도 가장 재미있었던 순간들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사장님이 이미 취한 팀장님에게 권한 소맥 여러잔을 내가 대신 다 마셔서 임원분들께 귀여움(?)을 받기도 했…지만… 술은 적당히 마셔야지…

그 프로젝트 이후에는 시그널링 게이트웨이의 한 파트를 개발을 단독으로 맡게 되었는데, SS7 이라는 시스템 표준의 MTP3 레이어를 개발하는게 목적이었고, 어느 정도 데이터 처리가 되게끔 구현한 다음, 사용자 입력을 처리하는 부분을 살짝 만들었다. 그래도 이게 실제 시스템에 통합되었을때 제대로 굴러는 갈지 너무 부담스러웠던 상태였다.

그러던 어느날, 기계사업부로 운영되고 있던 합병한 회사측에서 개발을 추진하던 머신사업, 정확히 이야기하면 공업용 3D 프린터 사업쪽에 개발인력이 필요해서 그쪽으로 편입되었다. 나는 어차피 통신쪽 개발 인력이 아니라 한편으로는 다행이었는데, 그 때쯤 부터는 코드와는 조금 멀어졌다. 서울 양천구 목동의(너무 자주 왔다갔다 해서 이것만 잘 기억난다) 한 캐드 관련 회사와 공업용 3D 프린터에서 사용될 소프트웨어의 사양과 구성 방법에 대해 가닥을 잡아가고 있을때 쯤…

세월호가 침몰했다.

당시에 느꼈던 참담한 마음, 좌절감, 분노같은 감정들이 잠시 모든 걸 잊게 했다. 한 동안은 우울한 마음만 있었던 것 같다. 그러다 시간이 지나고 정신을 차렸을때는 눈 앞의 현실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냥 휩쓸려 떠내려가듯 살았던 최근 몇 년간을 되돌아보게 되었다. 그 비극을 개인사와 엮는게 말이 되진 않지만, 뒷통수를 후려 맞은 기분이 있은 이후, 이런 저런 생각이 많이 들었다. 이런 나라에 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시작으로 꼬리를 물다보니 “내가, 지금, 여기서, 무엇을, 왜 하고있나”에 대한 생각과 복잡한 마음들이 스쳐지나갔다.

삶에 대한 생각이 지나간 후, 조금 더 현실에 가까운, 일에 대한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차게 되었다. 대기업 문화는 경험해보지 않았지만 어쨌든 싫다, 중소기업에서 힘들지만 아기자기하게 크고 싶다… 이런 신념에 가까운 생각들이 허상으로 느껴졌다. 제대로 하는 것 하나 없이 전문가로서의 경력을 쌓지 못하고 있었고, 특히 개발 활동이 가장 왕성해야 할 그 당시에 개발 외적인 잡일만 하다보니 먹고 살기 위함 이상도 이하도 아닌게 되었으니까. 국내 회사에서 일하는 동안은 운동도 거의 못했다. 정신적, 체력적으로 너무 많이 지쳐있고 망가져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스타트업이 그 때쯤 많았다면 도전이라도 해봤을 것 같기도 한데, 정보가 부족했다. 아무튼 그렇게 개발자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이 커져가고 있을때 쯤, 그 고민에 대해 개발자이며 미국인인 매형과 이야기를 나누게 된 것으로 인해 인생의 큰 변혁기를 맞이했다.

평소에는 매형과 그런 속 깊은 이야기는 하지 않았었는데, 하길 잘했지 뭐야.

원격 외노자

나와 매형이 나눴던 대화가 누나와 매형을 통해 매형이 다니던 10인 미만 규모로 구성된 웹/모바일 앱을 개발하는 작은 회사, 그 곳의 사장의 귀에도 들어갔다. 함께 식사하던 중 이야기를 나누다가 언급된 듯 한데, 정확한 이야기는 모르겠지만 나에 대해서, 나의 일관성 없는 커리어에 대해서 호기심을 가졌다고 했다. 겉표면만 보면 석사졸업에 제조 자동화, 로봇, 통신분야의 개발을 경험한 개발자니까. 나는 그 와중에 정반대로, 한국에서는 나이까지 따지면 경력 빌드업이 완전 실패했다고 좌절하고 있던 참이었다.

어느날 Facebook 을 통해 친구 추가 요청이 들어왔다. 사장이었다. (친한 사이라 사장님이라고 하긴 좀 이상해서 사장이라고 하겠다) 수락 후에는 메시지가 도착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개발과 커리어 이외의 이야기도 서로의 포스팅에 댓글을 달면서 “아는 사이”로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고민에 시달리던 어느날 문득, 이런 인연을 적극 활용해서 뭔가를 보여주고 일자리를 얻어야겠다고 작심했다. 회사 입장에서 외국인을 고용하려면 비자해결을 포함한 복합한 절차를 거쳐야 하는데, 회사의 규모가 크지 않아서 나를 고용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고 생각은 했다. 특히 그 회사가 하던 일과는 거리가 먼 경험만 갖고 있었던게 제일 부담스러웠지만, 마지막 남은 총알 한 발이라고 몇 번을 되뇌었다. 바로 행동에 들어갔다.

경험해보지 않은 Python 으로 뭔가 간단한 걸 만들고, 영문 블로그를 쓰자! 고 다짐했다. 기존에 해보지 않은 새로운 언어와 라이브러리로 뭔가를 만들며 기록하면, 나를 알고 싶어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내가 어떤 사고로 개발을 하고, 어떤 고민을 하는지 파악하기 쉬울거라 생각했다. (나… 이렇게 간사하다…) 그때는 마침 생산성에 대한 생각도 많았던 시기라 뽀모도로 타이머를 만들고 그 과정을 기록하기로 결정했다.

개발 기록을 남겼던 해당 블로그는 아쉽지만 그때 써먹은 이후로 거의 손대지 않고 있다가 백업도 못하고 없어졌다. 영상 기록만 3개가 남아 있더라. 대략 이런 과정을 통해 Python 과 Qt 로 뽀모도로 타이머를 만들었다.

A. 프로토타입: 25분 뽀모도로 / 5분 짧은 휴식

B. GUI 애니메이션 구현

C. 단계별 전역 알림기능 구현

전체적으로 한 달 정도 걸렸던 것 같다. 퇴근하고 집에 오면 공부하고 구현하고, 영어로 개발노트를 쓰고, 블로그로 옮기고를 반복했다. 많이 피곤했지만 빨리, 예쁘게 완성을 해야한다는 강박때문에 멈출 수도 없었다.

모든게 완성된 날, 매형에게 블로그를 보여주고(매형에게는 이미 입사 의지를 알린 상황이었다) 어떤 형태든 사장의 반응을 기다리며 긴장 속에서 살고 있었다. 일주일 쯤 지났을까. 사장이 오랫만에 Facebook 메시지를 보내왔다. “그대는 나와 함께 일할 생각 있느냐?” 라고. 그 날 늦은 밤, 잠시 화상채팅을 하며 약식 면접을 치루는 겸 인사를 나눴고, 사장은 그 동안 주고 받았던 대화와 메시지로 면접을 대신하겠다고 했다. 블로그도 봤다고 했다. (씨익)

그 회사는 Ruby on Rails(웹) 와 Rubymotion(모바일)을 주축으로 한 기술들로, 고객들의 앱을 개발하는 컨설팅 에이전시 형태의 업체였다. 사장은 내가 다양한 경험들을 했어도 워낙 다른 분야에 있어서 함께 일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은 가졌었다고 했는데, 가능성이 보여서 채용을 하겠다고 했다.

그 날 밤, 잠을 잘 수 있었을까? 허허.

사장은 그 때쯤 회사에 원격근무를 도입하고 싶어했던 참이라, 미국 이주에 관련된 복잡한 비자나 서류, 비용문제도 건너띌 수 있으니 나만 괜찮으면 원격 형태로 근무하면 어떻겠냐고 물었다. 아쉽기도 하고 다행이기도 했다. 결정적인 질문을 받고 보니, 당장 떠나고 싶은 마음은 없었나 보다. 원격근무든 뭐든 일자리를 줘서 고맙다고만 했다.

꼬박 밤을 지새고 퀭한 눈으로 출근해서는 팀장님께 퇴사 의사를 밝혔다. 그 당시 합병한 회사의 목적(주식 상장회사 타이틀을 갖는 것으로 추측한다)이 달성되고 있어서, 내가 속했던 통신사업부는 사이즈를 축소하는 중이었고, 인원 감축도 조금 있던터라 팀장님은 강력히 말리지 못하셨다.

힘들게 일했지만 너무 좋은 사람들만 있었던 회사라 마음이 좋지 않았다. 다들 잘 되시길 마음속으로 바라는 것 밖에는 다른 방도도 없었다. 만감이 교차하는 가운데 몇 주 후에 자리를 비우고 떠났다.

방 계약 기간이 남아있었던터라, 새 회사와 원격근무에 적응하기 까지 얼마 동안은 대전에 머물렀다. 그 이후에 대구로 다시 이사를 했고, 바다를 건너가 회사를 방문도 하고, 동료들과도 어울리고, 새로운 것들을 공부하고… 그렇게 외국에 있는 회사를 위해 원격으로 일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 이후로 2022 년인 지금시점에 8년에 가까운 시간을 지금 회사와 함께 하고 있다. “인생사 새옹지마”라고들 하지만, 이 회사에서 은퇴까지 하고 싶다는 생각도 평소에 종종 하는 편이다.

1년에 한 두 번 모이는, 모두가 원격으로 근무하는 자그마한 회사에서 열심히 일하고 즐겁게 지내고 있다.

이야기를 풀어보면 재미있을 것 같아서 무작정 시작은 했지만, 막상 돌아보게 되면 별 것 없을 것 같아서 우려도 조금 했다. 그런데 꼭꼭 숨겨놨던 외장하드와 노트를 펼쳐놓고 기억을 더듬어 맞추다 보니 내용이 엄청나게 늘어나서 놀랐고, 재미가 붙어서 짬날때 마다 조금씩 쓰게 된지 5일이나 흘러버렸다.

마지막 여담을 하나 덧붙이자면, 이 포스팅의 제목인 “생의 절반” 은 사실, 시인 이병률님의 동명의 시에서 이름을 빌려왔다. 절반으로 요약한 인생에 대해 포스팅하려고 생각하다보니 떠오른 시 였다. 마지막 연(聯)은 이렇다.

나머지 절반에 죽을 것처럼 도착하더라도 있는 힘을 다해 지지는 마오

후회없는 삶은 아니지만 나름 힘들면서도 열심히, 재미있게 살아왔던 것 같다. 숨쉬고 있는 지금 순간이 삶의 절반인지 아닌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지만, 어쨌든 있는 힘을 다해 지고 싶지는 않다. 앞으로도 적당히 때로는 열심히, 가능한 한 많이 즐기면서 살고싶다.

희망이자 힘을 다하고 싶은 다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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