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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의 절반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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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원 시절 (학업편)

학부시절에 있었던 연구실은 미디어통신, 영상처리 및 패턴인식 각각의 분야에 계신 두 분의 교수님들께서 연합해서 운영하시던 곳이었다.

간혹 우스갯소리로 “대학원생들은 교수님의 노예” 같은 이야기를 듣곤 했는데, 두 교수님들은 매너가 너무 좋으시고 학생들을 잘 챙겨주셨다. 개그와 센스도 넘치시는 분들이셨고. 참고로, 졸업 후 10년이 넘은 지금도 술 한 잔 하며 친하게(?) 지내고(!?) 있다.

겪어보지 못한 일. 아마도 대충 다녔기 때문이지 않을까.

호주에서 돌아온 이후에 교수님들께서는 대학원 진학을 적극적으로 권장하셨는데(반은 장난스럽게 말씀하시긴 했다만) 나는 계속 취업에만 집중하고 싶다고만 답변드리다가… 끝내는 돌아서게 되었다.

같은 학교 학부졸업 후 대학원 진학은 등록금의 절반이 지원되었고, 조교활동을 하면 추가로 100%가 지원되서 사실은 돈을 벌면서(50%는 용돈이 되는 셈이었다) 학교를 다닐 수 있었던 시스템이 어느정도 결정적인 원인 중 하나였다. 어찌되었건 도망치는 것이 유예기간을 갖는 것이 최우선 순위였고, 그것을 유지하는 것에도 생활비는 필요 했었으니까.

어쨌든, 다른 대학원은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있던 연구실에서는 교수님께서 정해주신 연구분야를 대학원 첫 학기 부터 수행하고 발전시키면서 여러 논문 작성과 국내외 학회발표, 해외 저널에 논문 투고를 하면서 졸업 논문으로 끝을 맺는것이 목표였다.

그런데… 수학에 젬병인 나에게 영상처리와 패턴인식은 “도망쳐서 도착한 곳에, 낙원은 없는 법이야”를 절실히 깨닫게 해줬다. 2차 방정식도 못 푸는데 Fourier Transform 은 다 뭐래…?! Support Vector Machine 은 RATM 같은 밴드명인가…?! 아무튼 너무 힘들었다.

1. 혈액세포 영상 세그멘테이션

나에게 할당된 연구분야는 혈액세포 영상 세그멘테이션에 관련된 것이었는데, 기존 선배들도 했던 분야였고, 나는 Seam Carving 이라는 기술을 접목시키는 것이 목적이었다. 현재 Photoshop 에 Content-Aware Scale 이라는 이름으로 포함되어 있기도 한 기술. 내 기술은 아니고… 아무튼, 분명 한 주제의 연구로 졸업까지 간다고 했는데 소제목에 번호가 붙은 이유가 있다.

이제는 이런 이미지만 보면 이가 갈린다.

긴 이야기를 최대한 짧게 요약하면, 백혈구의 핵 영역을 Saliency map 과 클러스터링 등의 조합으로 영역을 판단한 다음 단순하게 핵에 해당되는 영역 픽셀들을 저장할 수 있음에도, 이미지 왜곡이 생기면서 시간적인 부분에서 조차 이득이 없는 방법을 연구하던 중이라 너무 답답했다. “연구를 위한 연구”였지,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학구적인 목적성을 중요시하시는 교수님과 의견차이로 티격태격을 많이 했었다.

끝내 이 연구는 포기했다. 그렇게 1년에 가까운 시간이 날아갔다.

2. X-ray 영상 분류기법

교수님께서 X-ray 영상 분류를 새로운 연구 주제로 선택해 주셨는데, 방법은 같이 찾아보자고 하셨다. 그 당시 연구실에서는 선배들 때부터 Support Vector Machine 을 주력 분류기로 사용하고 있었고, 영상의 특징 추출 부분을 차별화하여 연구하고 있었다.

또 언급하지만 나는 수학에 대한 지식은 백지상태. 수식은 까막눈이어서 논문의 설명을 읽고 대충 이렇게 굴러가는구나 하는 느낌만 갖은채 영적인 연구(?)를 했다.

같은 연구실에 있는 대학원 동기 둘은 이미 졸업논문의 형태가 거의 다 갖춰졌는데, 나는 갓시작을 한 셈이라 마음이 타들어가고 있었고, 교수님도 딱 마음에 드는 뭔가를 던져주시지 못하고 계셨다. 그래… 내가 찾아야 하는게 옳지만 그래도 서글펐다.

논문 스터디를 하면서, Random Forest 라는 것의 존재를 알게 되었고, 비슷한 시기에 X-ray 영상의 특징을 잡기에는 기존에 많이 쓰이던 외곽선 추정 관련 방법들 보다, texture 특성을 “간략하게” 표현해서 중요도의 가중치를 높이는게 제일 좋겠다는 생각을 취중에 했다. (놀랍게도 사실이다) 또 얼마 지나지 않아 Local Binary Patterns 관련 논문들을 운명적으로(?) 찾게 된다.

해당 두 논문을 공부한 것을 토대로 주간 세미나를 마쳤지만 교수님께서는 그다지 달가워하지 않으셨다. 너무 단순해서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을 것 같고, 따라서 논문거리가 되질 않을 것 같다고 우려하셨다. 다른 논문들을 살펴보자고 하셨지만, 나는 뭔가 이거다 하는 느낌이 너무 강해서 며칠인지 몇 주 인지 기억은 안나는데, 꽤나 오래 붙잡고 코드를 썼는데, 그 후 결과를 보고 놀랄 수 밖에 없었다.

SVN 으로 분류한 것에 비해 속도는 말도 안되게 빨랐고(내 구현이 잘된게 아니라 Random Forest 의 특징이다), 다른 특징 추출기를 쓴 것 보다도 정확도가 높았기 때문이다. 새벽까지 붙어서 결과를 뽑았던 아름다웠던 그 날 밤은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운이 좋았지.

입력된 영상이 두개골 정면인지 파악하는 과정은 대충 이렇게 생겼다.

교수님도 처음에는 믿지 않으셨지만(?) 끝내 긍정적으로 돌아서셨고, 이후 연구 끝에 지역 단위의 Wavelet Transform 에 기반한 Center-Symmetric Local Binary Patterns 가 X-ray 이미지 특징 추출에 좋고 Random Forest 를 통해서 학습시키면 아주 좋더라- 하는 결론으로 해외 저널에 투고하고 졸업 논문으로 정리해서 대학원 생활을 마감했다.

이렇게 자랑질을 하고 있지만, 내 논문을 다시 찾아보며 정리하고 있는 중이다. 천신만고 끝에 뿌듯했던 순간이니 자랑하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뻔뻔하긴 하네…)

대학원 시절 (풍류편)

대학원 시절 학업의 반대쪽 단면에 대한 이야기들을 조금 덧붙여 본다.

사람을 좋아하는 건 바뀌지 않아서 대학원 진학 후에도 끊임없이 나돌아다녔다(?). 대학원 내에서는 선배들과 자주 어울리며 술자리를 같이 했었고, 학교 밖에서는 그 당시에 트위터와 비슷했던 “me2day” 를 가열차게 했었다. me2day 를 통해서 알게 된 사람도 많고, 가본곳도 많고, 웃고 울고 했었는데 없어진다는 소식을 듣고는 실제로 조금 절망했었던 기억이 난다. 돌아보면 아주 좋은 기억.

그리고 운동을 시작했다. 조금이라도 젊을때 체격과 체력 모두 키워보고 싶었던게 가장 큰 이유인데, 이때 대학원생활/사람/운동이 충돌하게 되었다. 그래서 하루 수면시간을 4시간으로 줄였었다. 20대 후반이었지만 젊어서 그렇게 버틸 수 있었던 것 같다.

아침 6시에 일어나서 운동, 8시 등교 후 조교활동, 오후에는 연구실에 잠깐 앉아서 뭐든 후딱 해놓고 싸돌아다니느라 거의 붙어있질 않았고, 연애하거나 사람들 만나서 놀다가 밤 11-12시쯤 집에 돌아와서 논문 스터디 등 연구실에서 해야할 일들을 하다가 2시쯤 잠들기를 거의 예외없이 꼬박 1년 반을 했다. 대학원 생활 2년 중 나머지 6개월은 더 강력하거나 아주 느슨한 스케쥴을 합한 시간이고.

하고 싶은게 많았기 때문에 죽을 정도까지는 힘들지는 않으니 계속 했던 것 같다. 그런데. 성취한 것도 많지만 그때의 여파를 수면장애라는 이름으로 10년이 지난 아직도 겪고 있다. 모든것은 trade-off 인 것이야… 잠을 줄여서 뭔가를 성취하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권장하고 싶진 않다.

6개월 만에 퇴사한 첫 직장

대학원 졸업을 앞두고 취업활동에 다시 들어간다. 석사과정을 감안하더라도 워킹홀리데이나 휴학등으로 인해 나이에 비해 늦은 취업이라 면접때는 매번 “그 나이 먹도록 뭐하셨어요??” 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물론… 순화된 버전으로.

수도권 취업은 이미 포기한 상태였는데, 학과 조교로 수업을 보조해드릴때 나를 좋게 봐주셨던 교수님 한 분께서 어떤 회사를 추천하셨다. 무식한 나는 이름을 못 들어본 회사라 관심을 껐고 기회를 놓쳤는데, 몇 달 뒤 알고보니 복지 좋은 프랑스계 회사였고… 거길… 갔어야 했다… 빠득.

그러다 보니, 살고 있는 대구지역 내에서 해결을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게 되었다. 학부 동기, 대학원 선배들이 몇 있는, 지역에서는 꽤 잘 나가는 편인, 약품제조자동화 관련 회사를 눈여겨 보고 있었는데 어쩌다 보니 출근을 하고 있었다.

6개월의 수습기간을 거치는 회사였는데, 뭐가 좀 희안하게 되서 혼자 프로젝트를 하게 되었다. 약품조제자동화기기는 이런 방식으로 동작한다.

  • 약품자동조제기 한 대에는 수개~백여개의 카트리지가 있음
  • 각 카트리지에는 한 종류의 약품이 들어감
  • 처방전이 전산으로 입력되면 패킷(약 봉지) 하나에 처방에 따른 약들이 들어가고 봉합됨
  • 조제된 약품이 든 패킷이 묶음 단위로 나오게 됨

동네 약국부터 대학병원까지 쓰이는 곳이 많아서 하드웨어/소프트웨어 모두 제품의 크기와 커스터마이징이 다양하게 되어있는 구조였다. 그런데 이런 문제가 있었다.

  • 주로 대학병원에서 쓰이는 대형기기는 장기투약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경우가 많음
  • 따라서 한 환자 당 하나의 대형 롤 단위로 약품이 조제됨
  • 그런데, 이번 롤의 마지막 패킷에 들어가야 할, 높은 카트리지에 있던 약이 다음롤에 들어간 경우가 발생 (고속으로 동작하는 기기에서 높이, 중력에 따른 타이밍 오류, 0.1% 미만으로 예측된 오류가 테스트에서 실제 발생하게 됨)
  • 해당 패킷에 잘못 들어간 약이 특정 환자에게는 치명적으로 작용할 수 있음

이런 이유로 인해 컴퓨터 비젼을 통해 약품의 크기, 모양, 색, 텍스쳐 등을 기반으로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여 처방전과 교차 검증을 수행하는 기기도 만들어졌다. 그런데 의약품이라는 특성상 신중한 검증이 필요해서, 그 기기의 결과 마져도 사람이 추가로 검증할 수 있는 사용자 소프트웨어를 만들어야 했던 와중에 내가 입사를 한 것이었다.

약품의 영상 / 검증기기의 영상 / 데이터베이스 정보를 교차적으로 검증할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사수도 없었다. 소프트웨어에 관련된 것은 물어볼 사람이 없었고, 제품과 그 제반적인 것들은 이팀 저팀 왔다갔다 하며 물어봤다. 저… 수습기간 입니다만…

아무튼 WPF(C#) 와 MS-SQL로 고생해가며 뭔가를 만들어냈다. 팀장님은 그게 생각보다 마음에 들었던지 임원 회의때 발표를 하도록 연구실장님과 일정을 잡았다. 네… 네?!?!

밤새우며 발표자료를 만든 후 바짝 얼어서 발표를 했고, 부회장님(회사의 대표. 회장은 “고.객.” 상징적이었다.)은 특허를 검토하라고 지시한다. (비하인드 스토리가 좀 있는데… 특허에 민감한 회사다) 연구실장님은 나를 따로 부르셔서 수습기간이 끝나면 직급을 선임 연구원에서 시작하게끔 추진하겠다고 말씀하셨다. 수습-연구원-주임-선임-책임-수석의 구조였다.

사실 이때까지만 해도 힘들었지만 좋았다. 수습이지만 내 목소리를 내기 시작도 했고. 그런데 이런 저런 문제들이 발생한다. 아주 많은 것들을 해야하는데, 제안한 것들(대부분 소프트웨어 기능 관련)은 무시되지 않은게 하나도 없었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연구실장님께서 다시 호출하셔서 하시는 말씀이, 임원 회의때의 내 발표와 관련된 승진 이야기가 생산팀 쪽에도 들어갔고, 몇 단계 건너뛴 승진은 반발이 심할거라며 미안하다고 하셨다. 석사 졸업으로 인해 회사 정책에 따라 주임으로 시작을 하되, 선임으로는 최대한 일찍 승진 시켜주는 걸로 하시겠다고. 승진 욕구는 전혀 없었는데, 마음이 힘들때라 이것 마져도 너무 싫은 소리로 들렸다.

그 외의 이야기들이 조금 더 있는데 그냥 마음속에 묻어두겠다. 수습 기간이 끝나기 직전인 6개월 즈음 퇴사를 했다. 다음 회사를 위한 자기소개서는 나이많은 늦깎이 신입이 1년도 못채우고 퇴사한, 형편없어서 잠깐 보고 걸러지는 종이가 되었다.

3개월의 백수기간

막상 백수가 되니 좋더라. 아무런 부담없이 오전에 외출해서 마시는 커피 한 잔은 얼마나 향긋하던지. 낮잠도 자고, 버스타고 멀리도 가보고 그랬다. 그런데.

대학원 시절에는 “이때 돈 모아봐야 부질없다”는 생각에 펑펑 잘도 쓰고 다녔었는데, 백수가 되니 그때 그 돈이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기억이 틀리지 않다면 첫 직장에서 모은 돈을 포함해서 통장에 300만원 정도 있었던 것 같다. “거지가 되어도 내 인생 내가 사는거, 부모님께 손 내밀긴 싫다”는 주의라 계란후라이 하나에 밥을 먹기도 했었고 아무튼… 좀 구차하게 살았다.

월세와 생활비로 돈을 거의 다 써갈때 쯤 구직을 시작했다. 서울에 있는 친구 보러가는 약속을 잡는김에 국정원 7급 시험도 쳐봤다(!?). 공부 하나도 안하고 응시했는데, 이게 객관식임에도 엄청 어렵더라. 아무튼 서울에서 잘 놀고 오긴 했다.

구직은 나쁘지 않았다. 의외로 서류가 통과하고 면접일정을 잡는 곳도 있었고, 심지어는 될까 싶어서 지원 해본 SI 사업부가 있는 모 대기업에도 1차 2차 전형을 통과했는데, 대기업에서 일하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어서 더 진행을 하지는 않았다. 지금 떠올려보니 별로 돈이 궁하지 않았나 보다.

그 무렵 대학원 동기인 친구로 부터 같이 일할 생각이 없냐며 연락이 왔는데, 로봇을 만들고 있다고 한다. 대전에 본사를 둔 통신쪽 관련 회사인데, 대구시의 사업 지원을 받으며 국책 과제를 수행한다고 했다. 팀은 7인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집과 가까워서 일단 서류를 보내고 바로 면접을 봤는데, 그 곳 대표인 소장님과 바로 밑 팀장님이 되게 점잖으시고 좋으신 분들 같았다. 개발 팀장님은 따로 계셨는데… 그 분에 대해서는 많은 이야기가 있다. 좋지 않은 것들로. 험험.

면접 후에 식사를 같이하면서, 같이 일했으면 좋겠다는 두 분 말씀에 나도 재미있을 것 같아서 다음주에 출근하겠다고 말씀 드렸다. 궁핍한 생활을 적당한 시기에 탈출하게 된 셈이었다.

새로운 회사에 출근한지 얼마 안된 어느날, 퇴근 하는 길에 다른 경로로 걸어보고 싶어서 걷다보니 회사와 집 중간쯤에 있는 모교 앞에서 호주인이 운영하는 펍, Sydney St. 를 발견했다.

너무 그리운 곳이다.

호주사람이 한국인 아내와 함께 오픈한 그 펍에 혼자 들어가서 맥주 한 잔 하며 주인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했던 첫 날 이래로, 주야장천 할 것 없이 들르다가 외국인/한국인 할 것 없이 정말 많은 사람들과 친해지고 너무 재미있는 시간을 보냈다. (펍은 없어졌지만, 지금까지도 주기적으로 만나서 소주 한 잔 하는 사람들은 다 그곳의 멤버들이다.)

그렇게 직장과 쉴 곳을 획득하며 석 달여간의 백수생활은 끝이 난다.

다음 이야기: 생의 절반(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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