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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의 절반 (1)

가끔 “어떻게 지금의 내가 만들어졌는지” 에 대해 궁금해한다. 운명을 믿는다거나 운에 대해 진지하지는 않은데, 돌아보면 유기적인 인생 이벤트들이 맞물리는 타이밍이 꽤나 좋았던 것 같고, 나름 꽤 재미있고 행복한 과거를 보낸 편이라고 믿고 있다.

그런 생각들을 하다보면 “인생 요약본”을 포스팅을 하는 것도 재밌을 것 같았다. 앞으로 기록할 이야기들의 씨앗으로 쓸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살아온 인생의 절반을 요약해보자. 뭐 이런 TMI 과잉의 호기 넘치는 짓거리를 한가한 주말을 맞이해서 해본다.

아무튼, “원격 외노자”라는, 살짝 흔하지 않은 (걸로 알고 있는) 현재 타이틀이 만들어지기 까지의 과거와, 관련된 몇 가지 관심사들을 시간순으로 굵직하게 잘라서 되돌아보려 한다. 요약을 한다고 해도 엄청 긴 글이 될 듯.

아마 고등학생 시절 말 즈음 부터 이야기 하는게 문맥을 만들어나가기 수월할 것 같고, 대략 절반쯤일 듯하다.

고등학교 끝자락

고등학교때 성적이 좋지는 않았다. 그 이전 중학시절/초등학교시절/always 처럼. 그럼에도 정보화 관련 보조업무를 맡으신 생물 선생님의 은덕과 수업을 빼먹을 수 있다는 특혜를 누릴 수 있는 기회에 힘입어 “정보 검색대회”에 출전하기로 했다.

사실 생물 선생님께서는 기대를 별로 하지 않으셨던 것 같은데, 운좋게도 시/도/전국대회에서 입상을 했다. PC통신도 많이 했었고, PPP 를 통한 접속을 통해서 인터넷에 일찍부터 노출되었던게 도움이 되었다. 당시에는 검색어 간 논리 연산자 사용은 물론, 특정 검색엔진과 웹사이트를 거치지 않으면 원하는 정보를 얻기 힘든 때였다.

AltaVista, Lycos, Excite, WebCrawler 등등 검색엔진들의 검색 결과도 천차만별이었고, 영화 정보는 IMDb 로 검색해야 된다던가 하는 특정 정보에 특화된 검색엔진을 많이 알고 있는게 정보력의 전부였던 시대였다. 56kbps 모뎀 사용으로 인한 전화요금 때문에 등짝 스매싱을 자주 맞았었고.

아무튼 그렇게 획득한 상장들을 들고 대학교 컴퓨터 특기자로 입학을 한다. 2년제 대학을 갈 생각이었는데 상장이 아깝다며 특기자 전형이라는 것을 알려주신 생물 선생님의 말씀에 귀가 팔랑거렸던 탓이다. 상장만으로는 안되고 전국 수능 평균 50% 안에 들어야 한다는 선생님의 말씀에, 수능을 30일 남겨두고 신내림 받은 사람처럼 공부했다. 결과는 무척 좋았다.

그러나 해당 성적과 특기자 조건으로 서울권 대학 진입이 가능했었다는 것은 대구에 있는 지방대 입학 후 뒤늦게 알게 된 사실이었다. 지방대를 괄시하는게 아니라, 사람들로 수두룩 뺵빽한(?) 서울에서 놀고 싶었거든.

대학 학부시절

컴퓨터 특기자인데 이상하게도 공학부로 입학을 하게 된다. 해당 년도부터 1학년은 학부로 입학하고 2학년때 전공을 선택하게 되는 시스템으로 바뀌었단다. (그게 뭐야….) 대신, 이름과 학번에 따라서 랜덤하게 과를 배정 받는다. 해당 과의 과목을 배우는 건 아니고, 선배들과 소통하며 학교를 알아가기 위해 엮어주는 시스템이었다.

그렇게 배정된 곳은 토목공학과.

선배들이 주최하는 회식에 참석할때는 공대에서 학교 동문까지 “마셔라~ 마셔라~” 같은 가사가 들어가는 노래를 부르면서 2열 종대로 누구 열병식처럼 행진했었다. 이하생략.

어쨌든 대학에서도 공부를 못했기 때문에 (특히 수학은 고등학교때 80점 만점에 22점 맞던 머리였다. 공대에서는 치명적이었다), 1학년 말에 과선택을 실패했고, 끝내는 졸업학기까지 가서야 “알았다 컴공으로 졸업장 써줄게” 정도의 생색내기식 과배정을 받아서 졸업을 하긴 했다.

여담으로, 소속된 과가 없어서 좋았던 점은, 과생활을 못했으니 선후배도 없었고, 공대 밖에서 멤돌았지만 그 기회를 적극 활용하여 사회대나 경영대 등 다양한 곳의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이러쿵 저러쿵 친구들을 만들어서 연애도 놀기도 했다는 것.

사실 떠올려보면 학부시절을 통틀어서 사이드로 수강했던 건축과 CAD 수업이나 철학, 인문교양 같은 과목은 성적이 엄청 좋아서 컴공이 적성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많이 하면서 괴로웠던 적이 많다.

이 스크린 샷이 남아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래도 에어컨 없는 원룸에서 자취하며 대구의 불지옥 같은 여름을 버티기 힘들어했던 것이 오히려 그 시기의 그런 괴로움에 해결이 되었던 것 같다. 더워서 도서관에 갔고, 할일이 없어서 Java 책을 붙잡고 잠을 청했던게 객체지향 개념을 익히는데 큰 도움이 되었고, 이후에 “세균전” 이라는 옛날 DOS 게임을 Java 로 구현 및 발표를 해서 학우 및 교수님께 칭찬을 분에 넘치게 받는 것으로 적성에 대한 자존감을 회복하는 계기가 되었다. 계속 이어서 컴공과 과목들을 수강하게 된다.

학부시절 관심사들

그 당시 관심있었던 것들 중 몇 가지를 늘어놓아 본다. 다음에 이어질 이야기들과도 어느정도 연관이 있으니까.

1. Linux

우연히 마이컴이라는 잡지를 통해 알게된 리눅스는 고등학생 시절부터 관심이 있었고 (3.5 인치 플로피 디스크 백여장에 가까운 Slackware 를 설치해보기도 했다.) 컴퓨터 공학과 진학에 어느정도 결정적인 관심을 갖게 만든 흥미로운 운영체제 였다. 동작원리 같은걸 깊게 알고 싶다기 보다는 사용 자체가 재미있었거든.

대학에서 대부분의 프로그래밍 과제들은 리눅스에서 작업을 했었다. 그래픽 툴을 만지거나 hwp 같은 문서작업만 윈도로 듀얼부팅을 했었고. 물론 게임도 주야장천 했다. 지금은 업무 특성으로 인해 macOS 에 정착을 했지만, Debian(unstable)을 개인서버 구축 등, 주 운영체제로 수 년간 사용했었다.

사실 맨날 IRC 에서 채팅만 하고 놀았다.

2. 3D 추상화

어릴때 부터 그림을 보는 것을 좋아했었는데, 그리는 것은 색약이라는 신체적 한계 때문에 좌절 후 애증의 대상으로만 남아있었다. 그렇게 그림과는 아무런 인연 없이 살다가 학부시절 초중반쯤 Photoshop 을 만질 일이 조금 있다보니 어줍짢은 창작욕이 생겼고, 도서관에서 대여한 책 한 권으로 의자 모델링하기 따위를 공부했던 3D Studio Max 도 날로 늘어가는 창작욕에 편승하는 도구가 되어가고 있던 즈음이었다.

그러던 중 인터넷에 떠도는 멋진 컴퓨터 배경화면들 중에서 디지털 그래픽 창작물들에 매력을 느꼈고, 그렇게 알게된 것 중 가장 좋아했던게 3D 추상화 였다. 당장 마우스를 붙잡고 몇 주 씩 밤낮으로 이렇게 저렇게 흉내내기 식으로 끄적이다 보니 재미있는 것도 그리게 되었고, 나중에는 꽤 괜찮은 결과도 있었다.

DeviantArt 라는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Daily Deviation (오늘의 작가 비슷한 그런거)로 선정되었던 것인데, 살짝 유치한 생각에서 출발한 그림이었지만 너무 뿌듯했던 순간이었다.

미상의 공간에 존재하는 영혼수집기라는 어떤 것을 그려보고 싶었고, SoulCollector 라고 이름 붙인 추상 창작물.

딱딱한 공학을 공부하던 중이라(농땡이였긴 했지만) 그림을 그린다는게 정서적인 균형에 좋았던 것 같다. 취미로 계속 이어나갔으면 좋았을걸 하는 후회를 하기도 했는데, 어쩌다 멈추게 되었는지는 도무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블로그 왼쪽 사이드바에 있는 psychedelic 에 몇 가지 그림들을 정리해뒀다.

3. 블로그와 웹디자인

위에 있는 그림 속 웹사이트 주소는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일기장 같이 쓰던 블로그인데, 태터툴즈라는 설치형 블로그에, 직접만든 스킨을 입혀서 잡다한 일상다반사를 기록했었다. 이런 생김새였는데 그 중 네 가지만 추려봤다.

한창 감수성에 시달리던 나이에(?) 넣었던 “반틈만 나온” 내 사진이 들어간 헤더와 내용은 부끄러워서 가렸다. 어쨌든 블로그를 통해서 소수지만 너무 좋은 사람들과 마음을 주고 받았고, 스스로를 되돌아 보는 시간도 가졌었다. 그 당시의 향수가 지금 이 블로그를 쓰고 있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비슷하게, 대학 초반에과 심지어 군대에서도 만들어봤던, 많이 부족하지만, 당시 유행하던 php 게시판인 그누보드나 제로보드를 붙인 자잘한 웹사이트들과 블로그의 스킨 제작경험이, 대학교 연구실에서 학부생 자리에 앉아 대학원 선배들을 도와주고 있던 당시 소소한 수익으로 이어지는 기적을 만들었다.

연구실 선배를 통해 재학중이던 학교의 경영대학원과 미디어아트대 홈페이지 제작 수주를 각각 따냈는데, (“제가 제일 싸게 해드립니다”를 시전했다) 몰입도 높은 일이었고 재미있게 작업했던 기억이 난다. 더욱이, 이때 생긴 자금이 워킹홀리데이를 하려 호주로 갈때에 큰 도움이 되었다.

호주 워킹홀리데이

학부생활 이후의 이야기로 다시 돌아온다. 2007년 9월, 그러니까 졸업학기를 한 학기 남겨두고 남들 다 취업활동을 하고 있을때 나는 잔혹한 현실을 무시하고 떠났다(…)

호주 서쪽에서 제일 큰 도시인 Perth 로 워킹홀리데이를 갔었는데 정말 잊지 못할 일들이 많았다. 다음해 8월까지 많은 일들이 있었는데도 생생하게 기억나는 것은 아마 처음 경험한 다른 문화권이었기 때문인 것 같다.

호주에서는 파트타임/풀타임으로 맥도날드에서 제일 오랫동안 일했다. 귀국 전 몇 주는 푸드코트에서 접시 수거 및 청소를 했었고. 가져간 돈과 일해서 번 돈으로 영어 학원을 두 군데 정도 다녔고, 그 곳에서 주로 친구들을 사귀었다. 아직도 페이스북에서 간간히 연락하는 친구들도 있다.

그때는 영어로 참 시원하게 말했던 것 같다. 문법의 정확도와 의미전달은 신경쓰지 않았고 형편없었으니까. 대충 뭘 말할지 생각이 마구 샘솟음쳐서 무식하게 다 틀려도 마구마구 빠르게 말했던 것.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지금 현재다. 한국말도 영어도 둘 다 제대로 못하고 있다. 호주 워킹홀리데이를 다녀왔고 지금은 영어권에 있는 회사에서 일하고 있다고 내가 영어를 잘할거라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대게 실망한다. 안타깝지만 사실이다.

친구들과 공원에서 함께 한 바비큐는 너무 좋았고 그립다

어쨌든 Kings Park 에서의 바비큐, 850km 를 남향해서 간 Monkey Mia 여행, 서호주 맥도날드에서 제일 빠른 손 등극, 같은 한인들에게 셰어하우스 사기를 당하고 돈이 없어서 짐싸들고 이틀간 기차역 앞에서 노숙한 일화(…?!)등 재미있는 일들이 많은데, 외장하드에 저장된 사진들을 바탕으로 기억을 쥐어짜서 몇몇 좋았던 순간들을 앞으로 꼭 기록해야겠다. 추억이라는게 막상 쓰면서 떠올려보니 이렇게 좋다.

지금도 일 년에 한 번쯤은, 해 떠있는 아침에 잠을 깨는 가끔은, 처음으로 머물렀던 홈스테이 하우스의 그 방에서 일어난 것 같은 오묘한 기분이 들때가 있다. 초감각적인 뭔가 인 듯 한데, 말로 설명하기는 불가능 한 것 같다.

잠시 취업활동

한국으로 돌아온 이후에는 “뒤쳐짐”에 시달렸다. 2001년에 입학했는데 군복무 기간이 잘못 맞물려서 햇수로는 4년이 걸렸거니와(12월 입영), 워킹홀리데이 등으로 인해 썼던 두 번의 휴학이 덧붙여져서 2008년에 하반기에 마지막 학기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형편없는 자소서와 제로 스펙으로 서울/경기 쪽 취업활동을 몇 군데는 시도했다. 당연히 서류전형에서 모두 탈락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청 놀아대기만 했다. 매일 밤낮으로 사람 만나고, 술 마시고… 더 어릴때도 여러번 방황을 했지만 이렇게 스케쥴까지 짜여진 방황(?)은 처음이었던 것 같다.

유예기간이 필요했다.

도망치는 것 같았지만 어차피 이런 상태로 취업은 도저히 안될 것 같았다.

다음 이야기: 생의 절반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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